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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5 | 1 | [[분류:근대 랜드사]][[분류:랜드해협]][[분류:루이나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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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1 (새 문서) | 3 |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gcolor=transparent><tablebordercolor=#536349><bgcolor=#536349><color=#fff> {{{+1 '''대서양-랜드해 전투'''}}}[br]Atlantik-Landmeer-Schlacht[br]Battle of the Atlantic–Land Sea || |
| 4 | ||<-2><bgcolor=#536349><color=#fff>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
| 5 | ||<-2><#536349><color=#fff> '''기간''' || | |
| 6 | ||<-2> [[1940년]] [[4월]] [[9일]]~[[1941년]] [[11월]] [[27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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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2> 북대서양 및 [[랜드해|랜드 내해]] 북부 해역 || | |
| 9 | ||<-2><#536349><color=#fff> '''원인''' || | |
| 10 | ||<-2> [[독일]] 해군 수상함대의 통상파괴전 개시 및 [[루이나]] 해상 보급로 차단 시도 || | |
| 11 | ||<-2><#536349><color=#fff> '''교전국 및 세력''' || | |
| r2 | 12 | ||<width=50%>'''연합군'''[br][include(틀:국기, 국명=루이나, 크기=23)][br][include(틀:국기, 국명=플로렌시아, 크기=23)][br][include(틀:국기, 국명=빌베른, 크기=23)][br][include(틀:국기, 국명=웨스타시아, 크기=23)]||'''추축군'''[br][include(틀:국기, 국명=나치 독일, 크기=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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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2><#536349><color=#fff> '''전력''' || | |
| 23 | ||전함 9척[br]항공모함 4척[br]순양함 27척[br]구축함 110여 척[br]호송 상선 2,400여 척 ||전함 4척[br]중순양함 5척[br]경순양함·구축함 30여 척 || | |
| 24 | ||<-2><#536349><color=#fff> '''결과''' || | |
| r2 | 25 | ||<-2> '''연합군의 전략적 승리'''[br]독일 수상함대의 대서양 돌파 저지 및 해상 교통로 유지 || |
| r1 (새 문서) | 26 | ||<-2><#536349><color=#fff> '''영향''' || |
| 27 | ||<-2> 독일 수상함 통상파괴전의 사실상 종결[br]루이나 호송선단 체계의 확립과 전시 생산·수리 체계 우위 입증 || | |
| 28 | ||<-2><#536349><color=#fff> '''피해 규모''' || | |
| 29 | ||상선 340여 척 침몰[br]전함 1척·순양함 3척·구축함 12척 상실[br]전사·실종 약 11,000명 ||전함 1척·중순양함 2척 침몰[br]다수 함정 대파 후 장기 수리[br]전사·실종 약 4,700명 || | |
| r5 | 30 | |
| 31 | [목차] | |
| 32 | [clearfix] | |
| 33 | ||
| 34 | == 개요 == | |
| r7 | 35 | 1940년 4월 9일부터 1941년 11월 27일까지 북대서양과 [[랜드해|랜드 내해]] 북부 해역에서 연합군과 독일 해군 수상함대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해상 교전을 통칭하는 표현. |
| 36 | ||
| 37 | 단일 전투가 아니라, 독일 수상함대가 [[루이나]]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벌인 통상파괴전과 이를 저지하려는 연합군의 호송·추격 작전이 약 1년 7개월에 걸쳐 이어진 장기 소모전이다. 대서양 전투가 주로 유보트를 상대로 한 대잠전이었다면, 이 전투는 전함과 중순양함 등 '''수상함 전력이 통상파괴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 |
| 38 | ||
| 39 | 연합군은 상선 340여 척과 전함 1척을 포함한 다수의 함정, 약 11,000명의 인명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독일 수상함대의 대서양 돌파를 저지하고 해상 교통로를 끝까지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독일은 전함 1척과 중순양함 2척을 상실하고 함대사령관 '''귄터 뤼첸스'''까지 전사하면서, 이 전투를 끝으로 수상함에 의한 통상파괴전을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 | |
| r8 | 40 | |
| 41 | == 배경 == | |
| 42 | === 독일 해군의 재건과 Z계획 (1935~1939) === | |
| 43 |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해군에 배수량 1만 톤 이하의 구식 전함 6척과 경순양함 6척만을 허용했고, 잠수함과 항공모함의 보유는 전면 금지했다. 한때 세계 2위를 자랑하던 독일 해군은 조약 체제 아래서 사실상 발트해 연안 경비대 수준으로 전락했으며, 스캐퍼플로에서 자침한 대양함대의 기억은 해군 내부에 굴욕과 설욕 의지로 남아 있었다. | |
| 44 | ||
| 45 | 재건의 첫 신호탄은 조약의 틀 안에서 나왔다. 1만 톤 제한을 지키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이를 초과하는 배수량에 28cm 주포와 디젤 기관을 얹은 장갑함, 이른바 '포켓 전함'이 [[1930년대]] 초 차례로 취역한 것이다. 순양함을 압도하는 화력과 전함을 뿌리치는 속력, 그리고 디젤 기관이 보장하는 긴 항속거리라는 조합은 함대결전이 아니라 대양에서의 통상파괴를 위해 설계된 것이었다. 열강 해군이 이 함종의 등장에 대응해 신형 순양전함 건조에 나섰을 정도로, 포켓 전함은 등장 자체만으로 건함 경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 |
| 46 | ||
| 47 | 1935년 '''영독 해군 협정'''은 재무장에 합법의 외피를 입혀주었다. 영국 해군력의 35% 수준까지 수상함 보유를 인정받은 독일은 기다렸다는 듯 순양전함 2척을 기공했고, 뒤이어 유럽 최대급의 신형 전함 2척의 건조에 착수했다. 서류상 협정의 톤수 제한을 준수한다고 신고된 이 전함들의 실제 배수량이 신고치를 크게 웃돌았다는 사실은 개전 후에야 드러났다. 같은 시기 항공모함 1척도 기공되었으나, 해군과 공군 사이의 관할권 다툼 속에 공정은 지지부진했고 이 배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 |
| 48 | ||
| 49 | 문제는 이 함대를 무엇에 쓸 것인가였다. 해군 내부에서는 [[에리히 레더]]를 중심으로 한 대수상함파와, 잠수함 집중 건조를 주장하는 유보트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레더는 잠수함이 보조 전력에 불과하며 대양에서 적의 해상 교통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균형 잡힌 수상함대뿐이라고 보았고, 이 노선의 결정판이 [[1939년]] 초 총통의 재가를 받은 Z계획이었다. 전함 10척, 항공모함 4척, 신형 장갑함 15척, 순양함 수십 척을 [[1948년]]까지 갖춘다는 이 구상은 완성될 경우 영국 해군과의 정면 대결까지 상정한 대해군 건설 계획이었으며, 이를 위해 육군·공군에 앞서는 자원 배분 우선권까지 부여받았다. | |
| 50 | ||
| 51 | 그러나 Z계획의 전제는 '전쟁은 빨라야 1944년 이후'라는 것이었다. [[1939년]] 9월 전쟁이 발발하자 계획은 착공 단계의 함선 몇 척을 남기고 전면 중단되었고, 독일 해군은 전함 2척과 순양전함 2척, 포켓 전함 3척이 전부인 미완성 함대로 세계 최대의 해군 연합과 마주하게 되었다. 개전 소식을 들은 레더가 "수상함대는 너무나 미약하여, 할 수 있는 것은 명예롭게 싸우다 죽는 법을 보여주는 것뿐"이라는 비관적인 기록을 남겼을 정도였다. | |
| 52 | ||
| 53 | 역설적으로 이 절대적 열세가 독일 해군의 전략을 명확하게 만들었다. 함대결전으로는 승산이 없는 이상, 남은 길은 우세한 적 함대를 회피하며 적의 가장 약한 고리, 즉 해상 교통로를 때리는 것뿐이었다. 포켓 전함부터 최신예 전함까지, 독일 수상함대의 모든 함정은 이제 통상파괴함으로 운용될 것이었고, 그 사냥터로 지목된 것이 바로 [[루이나]]의 생명선이 지나는 대서양-랜드 내해 항로였다. | |
| 54 | ||
| 55 | === 루이나 경제의 해상 교통로 의존 === | |
| 56 | [[루이나]]는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며 공업 생산력에서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으나, 그 성장 방식 자체가 태생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좁은 국토와 한정된 자원 기반 위에서 이룬 공업화였기에, 원료를 수입해 가공하고 완제품을 수출하는 가공무역형 경제 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도시화와 인구 증가로 식량 자급마저 무너지면서, 전쟁 직전 기준으로 루이나는 국민이 소비하는 식량의 약 절반, 석유의 9할, 철광석과 고무 등 주요 전략 자원의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었다. | |
| 57 | ||
| 58 | 이 수입의 압도적 비중이 지나는 길이 대서양 항로였다. 아메리카 대륙의 곡물과 석유, 각지 식민지와 자치령의 원자재가 대서양을 건너 랜드 내해 북부의 관문 항구들로 들어왔고, 여기서 루이나 전역의 공업지대로 분배되었다. 루이나가 보유한 상선대는 총 톤수 기준 세계 유수의 규모였으나, 이는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잃을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간기 루이나 경제학계에서 이미 "루이나는 90일치의 식량과 60일치의 석유 위에 떠 있는 나라"라는 경구가 회자되고 있었는데, 이는 해상 수입이 완전히 끊길 경우 국가 기능이 마비되기까지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 |
| 59 | ||
| 60 | 문제는 이 생명선의 지리적 취약성이었다. 대서양에서 랜드 내해로 진입하는 해역은 폭이 제한된 길목으로, 루이나로 향하는 거의 모든 선박이 예측 가능한 소수의 항로에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넓은 대양에서라면 상선 한 척을 찾는 일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지만, 이 길목에서는 통상파괴함이 자리만 잡고 기다리면 사냥감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셈이었다. 게다가 이 해역은 겨울철 폭풍과 짙은 안개가 잦아 초계기와 감시함의 눈이 자주 멀었고, 습격함이 치고 빠지기에 이상적인 기상 조건까지 갖추고 있었다. | |
| 61 | ||
| 62 | 지정학적 상황은 이 취약성을 한층 악화시켰다. 노르웨이 연안이 적대 세력의 손에 들어갈 경우, 독일 함대는 북해의 연합군 초계망을 우회해 피오르의 깊숙한 정박지에서 출격, 단 며칠의 항해로 이 길목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반대로 연합군 입장에서 이를 막으려면 광대한 북방 해역 전체에 초계선을 유지해야 했으니, 공격 측은 시간과 장소를 고르는 반면 방어 측은 모든 시간, 모든 장소를 지켜야 하는 전형적인 비대칭 구도였다. | |
| 63 | ||
| 64 | 독일 해군이 이 약점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후 노획 문서로 확인되었다. 개전 전 독일 해군 참모부가 작성한 대(對)루이나 전쟁 연구는 이 해역을 '루이나의 경동맥(Halsschlagader Luinas)'이라 명명하고, "루이나를 굴복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그 함대의 격멸이 아니라 월 60만 톤의 상선 격침"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Z계획의 함대 구성이 항속거리가 긴 통상파괴함 위주로 짜인 것도, 개전 후 독일 수상함대의 작전 목표가 일관되게 이 해역을 향한 것도 이 연구의 연장선에 있었다. | |
| 65 | ||
| 66 | 더 심각한 것은 루이나 측도 이 약점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간기 동안 해군 일각과 민간 연구자들이 여러 차례 해상 교통로 방호 문제를 제기했고, 1930년대 중반 의회에 제출된 한 보고서는 "적성국이 통상파괴전을 채택할 경우 6개월 내 배급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는 번번이 묵살되었다. 해군 주류는 함대결전에서 승리하면 교통로는 자동으로 지켜진다는 교리적 확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정치권은 막대한 호위함 건조 예산을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에 대한 보험료"로 치부했다. | |
| 67 | ||
| 68 | 결국 루이나는 세계에서 해상 봉쇄에 가장 취약한 경제 구조를 가진 채, 그 방호에는 가장 무관심한 상태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모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당시 루이나 해군을 지배하고 있던 교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
| 69 | === 함대결전 교리와 루이나 해군의 정체 === | |
| 70 | 아이러니하게도 개전 시점의 루이나 해군은 이 위협에 대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뿌리는 루이나 해군의 성공 경험 그 자체에 있었다. 루이나 해군은 과거 국가의 명운이 걸린 함대 결전에서 승리한 기억을 조직의 정체성으로 삼아 성장한 군대였고, 이 승리의 신화는 세대를 거치며 "해양의 지배권은 단 한 번의 결전으로 결정된다"는 교리적 확신으로 굳어졌다. 여기에 전간기 세계 해군을 풍미한 머핸류 해양력 사상이 수입되면서, 함대결전 교리는 반박 불가능한 정통 교의의 지위를 얻었다. 사관학교의 교육과정은 주력함 포술과 함대 기동에 집중되었고, 도상 훈련은 언제나 '결전 해역으로 향하는 적 주력 함대'를 상정하고 짜였다. | |
| 71 | ||
| 72 | 이 교리는 함대의 물리적 구성에 그대로 새겨졌다. 예산의 압도적 비중이 전함과 순양전함의 건조·유지에 투입되었고, 함대의 건제는 전함 전대를 정점으로 한 결전 서열 그 자체였다. 반면 호위함은 '보조함정'이라는 이름 아래 예산 심의 때마다 가장 먼저 삭감되는 항목이었으며, 대잠 장비와 대공 화기의 개발은 민간 기술에 의존하다시피 했다. 개전 시점에 루이나 해군이 보유한 전문 호위함은 노후 구축함을 개조한 소수에 불과했고, 상선 보호를 전담하는 상설 사령부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함대는 훌륭한 창이었지만, 방패는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 |
| 73 | ||
| 74 | 인사 구조는 이 편향을 재생산했다. 전함 함장과 함대 참모를 거치는 것이 제독으로 가는 유일한 정통 코스였고, 호위·초계·소해 병과는 '한직'으로 통했다. 자연히 야심 있는 장교들은 통상 보호 임무를 기피했으며, 그 분야에 남은 이들은 승진 심사에서 조직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다. 통상 보호와 호위함 중심의 함대 재편을 주장하던 소장파 장교들은 '순양함 학파'라는, 절반은 조롱이 섞인 이름으로 불리며 주류에서 밀려나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논리로 반박되기보다는 "전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넋두리"로 치부되었는데, 함대결전 교리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 들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
| 75 | ||
| 76 | 이 시기 한직을 전전하던 [[테오도르 란츠]]가 순양함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무관으로 파견되어 제1차 세계 대전기 대서양의 통상파괴전을 직접 관찰했던 란츠는, 미래의 해전이 함대 간의 결전이 아니라 교통로를 둘러싼 소모전이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1937년]] 해군 수뇌부에 제출한 「해상 교통 방호에 관한 의견서」는 이 확신의 집대성으로, 유사시 상선 독립 항행의 전면 금지와 호송선단 의무화, 호위함 200척의 단계적 건조, 해상교통로 전담 사령부의 창설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의견서는 부속 문서에서 통상파괴전 개시 후 월별 상선 손실을 추산하는 도상 계산까지 첨부하고 있었는데, 전후 검증 결과 이 추산치는 1940년의 실제 손실과 오차 범위 내에서 일치했다. | |
| 77 | ||
| 78 | 수뇌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의견서는 "함대의 공세 정신을 갉아먹는 패배주의적 발상"이라는 혹평과 함께 기각되었고, 심사 위원 중 한 명은 여백에 "호위함 200척의 예산이면 전함 3척을 만들 수 있다. 전함 3척이면 애초에 적이 바다로 나오지 못한다"라고 적어 넣었다. 이 메모는 함대결전 교리의 사고방식을 압축한 문장으로 후대에 자주 인용된다. 란츠 본인은 이 사건 이후 사실상 좌천되어 예비역 편입설까지 돌았으나,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바다가 증명해 줄 것이므로" 전역 대신 잔류를 택했다. | |
| 79 | ||
| 80 | 교리의 관성은 개전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1939년 9월 유럽 개전 소식에 루이나 해군 수뇌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력 함대를 결전 대비 태세로 남부 주 정박지에 집결시키는 것이었고, 북부 교통로의 초계는 무장상선순양함과 퇴역 직전의 경순양함들에게 맡겨졌다. 훗날 한 전사가는 이 배치를 두고 "금고 문 앞에 전 재산을 쌓아 두고, 금고 안을 지킨 격"이라고 평했다. | |
| 81 | ||
| 82 | 결국 1937년의 기각된 의견서가 재발굴되어 란츠 개혁의 청사진이 되기까지, 루이나는 3년의 시간과 수백 척의 상선, 수천 명의 선원을 수업료로 치러야 했다. 그리고 그 수업료의 청구서가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40년 4월이었다. | |
| 83 | === 개전과 위장 평화기 (1939년 9월~1940년 4월) === | |
| 84 |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루이나]]는 영국·프랑스와의 동맹 조약에 따라 참전을 선언했으나, 이후 반년간 서부 전선에서 양측 육군이 요새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만 거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상에서도 주력 함대 간의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훗날 '위장 평화기' 혹은 '가짜 전쟁'이라 불리게 되는 이 기간, 신문들은 "선전포고된 평화"라는 자조 섞인 표현을 썼고, 루이나 국내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에 강화가 성립되리라는 낙관론까지 퍼져 있었다. | |
| 85 | ||
| r9 | 86 |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미 조용한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독일 해군은 개전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1939년 8월 말, 장갑함 2척과 보급함들을 미리 대서양의 대기 해역으로 내보낸 상태였다. 개전 선언과 동시에 이들은 통상파괴 작전에 돌입했고, 남대서양과 인도양까지 넘나들며 수개월간 상선 10여 척을 격침했다. 격침 톤수 자체는 크지 않았으나 파장은 그 몇 배였다. 단 한 척의 습격함을 잡기 위해 연합군은 순양함과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수색 전대를 8개나 편성해 대양 전역에 뿌려야 했으니, 통상파괴전이 강요하는 비대칭적 소모의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
| r8 | 87 | |
| 88 | 이 초기 습격전은 1939년 12월 남대서양에서 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연합군 순양함 전대가 장갑함 1척을 포착해 손상을 입혔고, 중립국 항구로 피항한 이 배는 수리 기한을 넘기자 출항 직후 승조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 배를 폭파해 가라앉혔다. 함장은 며칠 뒤 "함과 운명을 같이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자침 사건은 연합군 측에 개전 후 첫 승전보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나, 동시에 독일 해군 수뇌부에게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단독 항행하는 습격함은 결국 수적 우세에 몰려 소모된다는 것, 따라서 다음 출격은 추격 함대를 정면에서 뿌리칠 수 있는 고속전함 전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론이 이듬해 뤼첸스의 내해 침입 작전으로 이어진다. | |
| 89 | ||
| 90 | 한편 루이나 해군에게 위장 평화기는 뒤늦은 각성의 시간이었다. 개전 첫 달, 독립 항행하던 루이나 상선들이 잇따라 습격당하고 여객선 1척이 경고 없이 격침되어 민간인 수백 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터지자, 여론은 해군의 무대책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의회 국정조사에서 해군이 상선 보호 전담 조직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해군 수뇌부 일부가 경질되었고, 그 공백을 타고 그동안 묵살되어 온 순양함 학파의 주장이 처음으로 정책 테이블에 올랐다. 1939년 말 승인된 호위함 긴급 건조 계획, 이른바 '방패 계획'은 기각되었던 란츠의 1937년 의견서를 사실상 그대로 옮겨 온 것이었다. | |
| 91 | ||
| 92 | 문제는 시간이었다. 조선소의 선대는 이미 주력함 건조와 상선 수주로 가득 차 있었고, 설계 간소화와 민간 조선소 동원에도 불구하고 첫 양산 호위함이 취역하기까지는 아직 1년 이상이 남아 있었다. 해군은 임시방편으로 노후 구축함의 개조와 원양 어선·예인선의 징발로 구멍을 메웠으나, 이 급조 호위 전력의 실태는 "잠수함을 쫓기에는 느리고, 전함에게서 도망치기에는 더 느린 배들"이라는 당시 한 호위함장의 자조로 요약된다. 결국 위장 평화기의 루이나는 올바른 처방전을 손에 쥐고도 약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환자의 처지였다. | |
| 93 | ||
| 94 | 그 기다림의 끝은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최악의 방향에서 왔다. 1940년 초부터 연합군 정보망에는 독일군의 스칸디나비아 방면 움직임을 시사하는 첩보가 누적되고 있었고, 2월에는 노르웨이 영해에서 독일 보급함이 연합군 구축함에 나포되는 사건이 벌어져 양측의 긴장이 한계까지 치솟았다. 루이나와 영국 수뇌부는 노르웨이 연안이 독일의 손에 들어갈 경우 북방 초계망 전체가 무력화된다는 점을 뒤늦게 인식하고 대응 상륙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으나, 결단은 번번이 미뤄졌다. 그리고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군이 먼저 움직였다. 반년의 위장 평화가 끝나고, 대서양-랜드해 전투의 막이 오른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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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 == 전개 == | |
| 97 | === 개전: 북해 돌파전 (1940년 4월) === | |
| r10 | 98 |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군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대한 동시 침공을 개시했다. 작전의 성패는 전적으로 해군에 달려 있었다. 상륙 부대를 태운 함정들이 연합군 초계망이 깔린 북해를 종단해 나르비크까지, 6개 항구에 동시 상륙해야 했기 때문이다. [[에리히 레더]]는 이 작전을 "해전사의 모든 법칙에 반하는 도박"이라 부르면서도 함대의 사실상 전부를 밀어 넣었다. 도박의 판돈은 명확했다. 성공하면 독일 해군은 대서양으로 나가는 뒷문과 루이나의 생명선을 겨눌 전진 기지를 동시에 얻는 것이었고, 실패하면 수상함대의 소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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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 연합군은 기습을 당했다. 공교롭게도 침공 전날 연합군 역시 노르웨이 영해에 기뢰를 부설하는 작전을 진행 중이어서 상당수 함정이 해역에 나와 있었으나, 첩보의 단편들은 "독일 함대의 대서양 돌파 시도"로 오판되었고, 함대는 상륙 선단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통상파괴함을 쫓아 엉뚱한 해역으로 북상했다. 루이나 해군의 대응은 더 굼떴다. 함대결전 교리에 따라 남부 주 정박지에 집결해 있던 주력 함대는 출항 준비에만 이틀을 소모했고, 그 사이 노르웨이의 주요 항구들은 차례로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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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 그렇다고 독일 측이 무상으로 노르웨이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침공 당일 오슬로 피오르에서는 노르웨이 연안 요새의 구식 포와 어뢰가 독일 최신예 중순양함 1척을 격침시키는 파란이 벌어졌고, 침공 함대를 호위하던 순양전함 전대는 노르웨이 근해에서 연합군 순양전함 1척과 조우해 악천후 속의 포격전 끝에 손상을 입고 이탈했다. 초계 중이던 연합군 구축함 1척은 독일 중순양함과 단독으로 조우하자 연막을 치고 돌진, 격침당하기 직전 적함의 현측을 들이받아 대파시키고 침몰했다. 함장에게는 사후 최고 무공훈장이 추서되었는데, 훗날 이 서훈의 추천서를 쓴 것이 다름 아닌 적함의 함장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개전 초기의 일화로 회자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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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 전투의 초점은 곧 최북단의 나르비크로 옮겨갔다. [[4월 10일]]과 [[13일]] 두 차례에 걸쳐 연합군 구축함대와 전함이 좁은 피오르 안에 갇힌 독일 구축함대를 습격했고, 그 결과 독일 해군은 보유 구축함의 절반에 해당하는 10척을 한꺼번에 상실했다. 피오르 양안의 산자락 사이에서 벌어진 이 근접 난전은 전술적으로는 연합군의 완승이었으나, 정작 상륙한 독일 산악 부대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바다에서 이기고 육지에서 지는 이 기묘한 구도는 노르웨이 전역 전체의 축소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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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 | 6월 초 연합군이 노르웨이에서 최종 철수하면서 전역은 독일의 전략적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양측의 손익 계산서는 간단치 않았다. 독일 해군은 노르웨이의 피오르라는 이상적인 출격 기지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중순양함 1척과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을 잃고 순양전함 2척과 장갑함 1척이 장기 수리에 들어가, 한때 가동 가능한 대형함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까지 몰렸다. 특히 구축함대의 궤멸은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이후 독일의 대형함들은 충분한 호위 없이 단독 혹은 2척 단위로 출격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대서양-랜드해 전투 전 기간에 걸쳐 독일 수상함대의 구조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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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 루이나 해군이 치른 수업료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함정 손실 자체는 크지 않았으나, 개전 벽두의 대응 실패는 함대결전 교리의 파산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결전을 위해 아껴 둔 주력 함대는 정작 결전이 벌어질 때 이틀 늦게 도착했고, 그 사이 전략 지도는 돌이킬 수 없이 바뀌어 있었다. 노르웨이 상실로 북방 초계망의 전제가 무너지면서, 이제 독일 함대는 피오르에서 출격해 하루이틀 항해로 루이나의 경동맥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 |
| r8 | 109 | === 위장순양함과 첫 습격 (1940년 5월~8월) === |
| r11 | 110 | 노르웨이 전역으로 대형함 대부분이 수리 독에 들어간 1940년 늦봄, 통상파괴전의 첫 주역으로 나선 것은 뜻밖에도 전함이 아니라 화물선이었다. 독일 해군은 쾌속 화물선을 개조해 구식이지만 경순양함급의 15cm 포 6문을 화물창 격벽과 가짜 갑판실 뒤에 숨기고, 어뢰발사관과 기뢰, 수상 정찰기까지 실은 위장순양함들을 차례로 출항시켰다. 겉보기에 이들은 어느 항구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립국 상선이었다. 선체 도색과 가짜 굴뚝, 목재 구조물로 실루엣을 바꾸고, 중립국 국기와 위조 선적 서류까지 갖춘 이 배들은 필요하면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다른 배로 '변신'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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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 | 전술은 단순하고 잔혹할 만큼 효과적이었다. 독립 항행 중인 상선에 평범한 상선인 척 접근한 뒤, 사거리 안에 들어오면 위장을 걷어내고 국제신호기로 정선과 무선 침묵을 명령하는 것이다. 응하면 승조원을 포로로 옮기고 배를 격침 혹은 나포했고, 조난 신호를 타전하려 들면 즉시 포격이 쏟아졌다. 1940년 5월부터 8월까지 넉 달 동안 위장순양함 5척은 대서양 남부와 랜드 내해 어귀에서 상선 40여 척, 약 25만 톤을 격침하거나 나포했으며, 그중 한 척은 연합군 초계망이 조밀한 랜드 내해 남부까지 침투해 '유령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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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 | 톤수보다 무거운 것은 심리적 타격이었다. 위장순양함의 본질은 "모든 상선을 잠재적 군함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이는 바다 위의 신뢰 자체를 무너뜨렸다. 상선들은 수평선에 낯선 배가 보이면 일단 침로를 꺾었고, 조난 신호에 응답하러 가는 것조차 함정을 의심해야 했다. 해운 보험료는 항로에 따라 개전 전의 열 배까지 폭등했으며, 중립국 선사들이 루이나행 수송 계약을 기피하거나 위험 할증료를 요구하면서 수입 물가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격침 상선 몇십 척이 아니라 '어디에도 안전한 바다가 없다'는 인식 그 자체가 무기였던 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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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 | 연합군의 대응은 헛손질의 연속이었다. 위장순양함의 정체가 보고될 때마다 순양함 수색대가 출동했으나, 보고되는 인상착의가 매번 다른 데다 습격 지점과 발견 지점이 수천 킬로미터씩 떨어져 있어 수색은 번번이 빈손으로 끝났다. 6월에는 루이나 무장상선순양함 1척이 위장순양함과 조우해 포격전을 벌였는데, 상선끼리 서로 포를 쏘는 이 기묘한 결투는 양측 모두 화재를 일으킨 채 헤어지는 무승부로 끝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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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 | 전환점은 [[8월 17일]]에 왔다. 랜드 내해 한복판에서 위장순양함 1척이 등화를 밝히고 항행 중이던 루이나 여객선을 야간에 뇌격, 격침시킨 것이다. 위장순양함 측은 등화관제 위반 선박으로 오인했다고 주장했으나 여객선은 국제 규정대로 조명을 켠 상태였고, 승객과 승무원 400여 명 중 구조된 것은 절반이 되지 않았다. 희생자 명단에 어린이 수십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루이나 여론은 폭발했다. 신문들은 이를 '학살'로 규정했고, 그때까지 전쟁을 남의 일처럼 여기던 중립 성향 여론까지 단숨에 돌아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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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 | 정치적 후폭풍은 해군의 풍경을 바꿔 놓았다. 사건 2주 만에 의회는 그동안 해운업계의 반대로 표류하던 호송선단 의무화 법안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고, '방패 계획'의 호위함 건조 예산은 심의 없이 증액되었다. 해상교통로 전담 사령부의 창설도 이때 확정되어, 연말 [[테오도르 란츠]]의 취임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훗날 란츠는 회고록에서 이 시기를 "우리에게 필요했던 모든 권한은 유족들의 분노가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가장 부끄러운 부분이다"라고 술회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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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 | 한편 위장순양함들의 활동은 가을로 접어들며 서서히 한계를 드러냈다. 호송선단화가 진행되면서 손쉬운 사냥감이던 독립 항행선이 줄어들었고, 연합군이 상선 검문 절차와 항로 통제를 강화하면서 위장의 효력도 떨어져 갔다. 그러나 이들이 넉 달간 증명한 사실, 즉 소수의 습격함만으로도 루이나의 해상 경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은 독일 해군 수뇌부의 확신을 굳혔다. 위장순양함이 이 정도라면, 진짜 군함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수리를 마친 장갑함들이 출격 준비에 들어간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 |
| r8 | 123 | === 장갑함 출격과 선단 학살 (1940년 9월~11월) === |
| r12 | 124 | 1940년 가을, 노르웨이 전역의 상처를 수습한 독일 해군은 마침내 정규 군함에 의한 통상파괴전에 착수했다. 첫 주자는 디젤 기관의 항속거리를 앞세운 장갑함이었다. 9월 말, 장갑함 1척이 악천후를 틈타 덴마크 해협의 초계선을 돌파해 대서양으로 빠져나갔고, 사전에 배치된 보급함들과 합류하며 사냥터로 향했다. 위장순양함과 달리 장갑함은 숨을 필요가 없었다. 28cm 주포는 어떤 호위함도 사거리 밖에서 찢어발길 수 있었고, 26노트의 속력은 웬만한 추격을 뿌리치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단 하나, 진짜 전함과 마주치지 않는 것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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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 | 그리고 11월 5일, 이 장갑함은 대서양 한복판에서 루이나로 향하던 37척 규모의 호송선단 HX-84와 조우했다. 호송선단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선단의 호위 전력은 14cm 포 몇 문을 얹은 무장상선순양함 저비스베이 단 1척. 장갑함의 실루엣이 수평선에 나타난 순간, 선단의 운명은 산술적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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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 | 호위함장의 판단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선단에 산개와 연막 전개를 명령한 뒤, 자함의 뱃머리를 장갑함 쪽으로 돌렸다. 사거리도, 장갑도, 속력도 상대가 되지 않는 돌격이었다. 장갑함의 주포탄이 명중하기 시작한 뒤에도 호위함은 침로를 바꾸지 않았고, 함교가 날아가고 선체가 불덩이가 된 상태로도 40여 분을 버티며 계속 전진했다. 이 40분 동안 선단의 상선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연막과 스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호위함이 마침내 침몰했을 때, 장갑함이 해가 지기 전까지 따라잡아 격침한 상선은 12척이었다. 나머지 25척은 밤바다 속으로 사라져 살아남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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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 | 저비스베이의 최후는 즉시 전설이 되었다. 함장에게는 사후 최고 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생존 승조원들의 증언은 신문 1면과 라디오, 뉴스 영화를 타고 연합국 전역에 퍼졌다. 침몰 직전까지 마스트에 군함기가 걸려 있었다는 증언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었다. 위장순양함 시기의 공포와 무력감에 짓눌려 있던 루이나 여론에게 이 이야기는 처음으로 주어진 '싸우다 죽은 이야기'였고, 전쟁 채권 포스터부터 신병 모집 광고까지 어디에나 그 이름이 등장했다. 격침당한 쪽이 승리의 상징이 되는 역설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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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 | 그러나 해군 내부의 결산은 냉정했다. HX-84의 손실 자체보다 심각한 것은 그 여파였다. 장갑함이 대서양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후 2주간 모든 호송선단의 출항이 중지되었고, 이미 항해 중이던 선단들은 항로를 대폭 우회하느라 수송 일정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했다. 단 한 척의 습격함이 격침한 것은 상선 12척이지만, 마비시킨 것은 루이나의 해상 수송 체계 전체였던 것이다. 문제의 장갑함은 이후로도 남대서양과 인도양을 5개월간 유유히 누비며 상선 16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연합군 수색 전대들을 조롱하듯 따돌린 끝에 이듬해 봄 본국으로 무사 귀환했다. 단일 수상함 통상파괴 작전으로는 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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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 | HX-84는 양측 모두의 교리를 바꿔 놓았다. 연합군 측이 얻은 교훈은 명확했다. "전함급 습격함에는 전함급 호위가 필요하다." 이후 주요 선단에는 구식 전함이나 순양전함이 1척씩 배속되기 시작했고, 실제로 12월 랜드 내해 어귀에서 출격을 시도하던 독일 순양전함 전대가 호송선단 호위로 붙어 있던 구식 전함 1척을 발견하고는 교전을 포기한 채 회항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 처방의 효과가 입증되었다. 독일 측 수뇌부도 같은 장면에서 반대 방향의 결론을 끌어냈다. 구식 전함 호위를 정면에서 제압하려면 장갑함이 아니라 고속전함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 양측의 결론이 맞물리며, 전투는 다음 단계로 향하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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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 | 한편 이 소란의 한가운데서 루이나 해군 인사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HX-84 사태 직후 소집된 전훈 분석 회의에서, 예비역 편입 대기 상태나 다름없던 한 제독이 작성한 보고서가 수뇌부의 책상에 올라온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세 줄이었다. 호위 없는 선단은 선단이 아니다. 호위는 함정의 수가 아니라 체계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체계를 만들 시간은 이번 겨울뿐이다. 보고서의 서명자는 [[테오도르 란츠]]였다. | |
| r8 | 137 | === 란츠 개혁: 호송선단 체계의 확립 (1940년 12월~1941년 1월) === |
| 138 | === 뤼첸스의 내해 침입 작전 (1941년 1월~3월) === | |
| 139 | === 루이나 해군 최악의 날 (1941년 5월 24일) === | |
| 140 | === 사흘간의 추격전 (1941년 5월 24일~27일) === | |
| 141 | === 뤼첸스의 최후 (1941년 5월 27일) === | |
| 142 | === 잔존 함대의 항구 봉쇄와 항공 소모전 (1941년 6월~8월) === | |
| 143 | === 중순양함대의 마지막 출격 (1941년 9월~10월) === | |
| 144 | === 랜드 내해 북부 해전과 종결 (1941년 11월 27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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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 | == 결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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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 | == 영향 == |